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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III. 초기교회의그리스도상( 사도신경)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

 

Jesus of Galilee, Jesus of Nazareth라고도 하며, BC 6경 유대아에서 나서 AD 30경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며, 20세기 세계 인구의 1/3 이상이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다. 그의 행적과 메시지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에는 신학적 동기와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진정한 생애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The picture of Christ in the early church: The Apostles' Creed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상( 사도신경)

Even before the Gospels were written, Christians were reflecting upon the meaning of what Jesus had been and what he had said and done. It is a mistake, therefore, to suppose that such reflection is a later accretion upon the simple message of the Gospels. On the contrary, the early Christian communities were engaged in witness and worship from the very beginning. The forms of that witness and worship were also the forms of the narratives in the Gospel accounts. From this fact it follows that to understand the Gospel accounts regarding Jesus we must consider the faith of the early church regarding Christ. In this sense it is valid to maintain that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the Jesus of history" and "the Christ of faith," and that the only way to get at the former is by the latter. Christology, the doctrine about Christ, is then as old as Christianity itself.  

복음서들이 씌어지기 이전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말을 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성찰이 후기에 복음서의 단순한 말씀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초기 그리스도교도 공동체는 처음부터 증언과 예배에 참가했으며, 그 증언·예배의 형식이 복음서에 있는 설화 형식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에 대한 복음서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숙고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별이 없다는 것과 전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후자에 의해서라는 주장이 정당하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 자체만큼 오래된 것이다.

To comprehend the faith of the early church regarding Christ, we must turn to the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 where that faith found embodiment. It was also embodied in brief confessions or creeds, but these have not been preserved for us complete in their original form. What we have are fragments of those confessions or creeds in various books of the New Testament, snatches from them in other early Christian documents, and later forms of them in Christian theology and liturgy. The so-called Apostles' Creed is one such later form. It did not achieve its present form until quite late; just how late is a matter of controversy. But in its earliest ancestry it is very early indeed, perhaps dating back to the 1st century. And its confession regarding Christ is probably the earliest core, around which later elaborations of it were composed. Allowing for such later elaboration, we may say that in the Apostles' Creed we have a convenient summary of what the early church believed about Christ amid all the variety of its expression and formulation. The creeds were a way for Christians to explain what they meant by their acts of worship. When they put "I believe" or "We believe" at the head of what they confessed about God and Christ, they meant that their declarations rested upon faith, not merely upon observation.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기의 신앙이 구현되어 있는 [신약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신앙은 짧은 신앙고백이나 신조들 속에 구현되었지만, 본래의 완전한 형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책들 안에 있는 신앙고백들과 신조들의 단편이고,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문서들에서 취한 것들이며,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전례에 내포되어 있는 후기 형태의 신앙고백과 신조들의 단편이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후기 형태이며, 그 기원은 아마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사도신경은 초기 신앙고백의 핵심이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후기의 표현들이 구성되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의 다양한 표현과 형식 가운데서 초기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해 믿었던 요점을 사도신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조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예배행위의 일부였으며 무엇을 믿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서두에 "나는(또는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할 때, 그 선언이 신앙에 근거한 것이지, 단순히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PREEXISTENCE

선재

The statement "I believe" also indicated that Christ was deserving of worship and faith, and that he was therefore on a level with God. At an early date, possibly as early as the words of Paul in Phil. 2:6-11, Christian theology began to distinguish three stages in the career of Jesus Christ: his preexistence with the Father before all things; his Incarnation and humiliation in "the days of His flesh" (Heb. 5:7), and his glorification, beginning with the Resurrection and continuing forever. (see also Index: Pauline letters)   "내가 믿습니다"라는 진술은 그리스도는 마땅히 예배받을 대상이며, 따라서 그는 하느님과 동급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의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3단계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만물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한 그의 선재(先在), 성육신과 겸허(히브 5 : 7), 부활로 시작하여 영원히 계속되는 그의 영화가 그것이다.
Probably the most celebrated statement of the preexistence of Christ is the opening verses of the Gospel of St. John. Here Christ is identified as the incarnation of the Word (Logos) through which God made all things in the beginning, a Word existing in relation to God before the creation. The sources of this doctrine have been sought in Greek philosophy, both early and late, as well as in the Jewish thought of Philo and of the Palestinian rabbis. Whatever its source, the doctrine of the Logos in John is distinctive by virtue of the fact that it identifies the Logos with a specific historical person. Other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 also illustrate the faith of the early Christians regarding the preexistence of Christ. The opening chapters of both Colossians and Hebrews speak of Christ as the preexistent one through whom all things were created, therefore as distinct from the created order of things in both time and preeminence; the preposition "before" in Col. 1:17 apparently refers both to his temporal priority and to his superior dignity. Yet before any theological reflection about the nature of this preexistence had been able to find terms and concepts, the early Christians were worshipping Christ as divine. Phil. 2:6-11 may be a quotation from a hymn used in such worship. Theological reflection told them that if this worship was legitimate, he must have existed with the Father "before all ages." (see also Index: John, Gospel According to)   아마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진술은 [요한의 복음서] 서문일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의 성육신으로 동일시되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했고, 말씀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존재했다. 이 교리의 근거자료들은 필로나 팔레스타인 랍비들의 유대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에서 왔다. 그 자료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요한의 로고스 교리는 로고스를 특수한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신약성서]의 다른 저작들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 장도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했던 자이며, 따라서 시간과 탁월성에 있어서 창조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구별되는 독특한 자로 말한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의 '앞서'라는 말은 분명히 그의 시간적 선재성과 우월한 존엄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선재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의하면 단어와 개념을 발견하기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예배드리고 있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은 아마도 그런 예배에서 사용된 찬송으로부터 인용된 듯하다. 신학적인 성찰은 만일 이 예배가 합당하다면 그는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

By the time the text of the creed was established, this was the usual designation for the Saviour. Originally, of course, "Jesus" had been his given name, meaning "Yahweh saves," or "Yahweh will save" (see Matt. 1:21), while "Christ" was the Greek translation of the title "Messiah." Some passages of the New Testament still used "Christ" as a title (e.g., Luke 24:26; II John 7), but it is evident from Paul's usage that the title became simply a proper name very early. Most of the Gentiles took it to be a proper name, and it was as "Christians" that the early believers were labelled (Acts 11:26). In the most precise language, the term "Jesus" was reserved for the earthly career of the Lord; but it seems from liturgical sources that it may actually have been endowed with greater solemnity than the name "Christ." Within a few years after the beginnings of the Christian movement, Jesus, Christ, Jesus Christ, and Christ Jesus could be used almost interchangeably, as the textual variants in the New Testament indicate. Only in modern times has it become customary to distinguish sharply among them for the sake of drawing a line between the Jesus of history and the Christ of faith, and this only in certain circles. The theologians and people of many churches still use phrases like "the life of Christ," because "Christ" is primarily a name. It is difficult to imagine how it could be otherwise when the Old Testament implications of the title have become a secondary consideration in its use--a process already evident within the New Testament.   신조의 본문이 만들어졌을 때 이것은 구세주에 대한 통상적인 지칭이었다. 본래 '예수'는 그의 이름으로 '야훼가 구원한다' 또는 '야훼가 구원할 것이다'(마태 1 : 21)를 의미한다. 반면 '그리스도'는 '메시아' 칭호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이었다. [신약성서]의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칭호로 사용했지만(누가 24 : 26, Ⅱ 요한 7), 그 칭호가 매우 일찍부터 고유명사가 되었음을 바울의 용례로부터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이방인들은 그것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였고,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다(사도 11 : 26).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라는 단어는 주님의 지상 경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례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그리스도'라는 이름보다도 예수라는 이름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약성서] 내의 본문의 변형이 가리키듯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가 거의 병용되었다. 현대에 와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관습적으로 예민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일부 집단들에서만 그러했다. 많은 교회의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은 문구들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칭호에 대한 [구약성서]의 의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칭호가 어떻게 다른 형태가 되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God's only son.

하느님의 독생자

The declaration that 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is one of the most universal in the New Testament, most of whose books refer to him that way. The Gospels do not quote him as using the title for himself in so many words, although sayings like Matt. 11:27 come close to it. There are some instances where the usage of the Gospels appears to echo the more general implications of divine sonship in the Old Testament as a prerogative of Israel or of the true believer. Usually, however, it is evident that the evangelists, like Paul, meant some special honour by the name. The evangelists associated the honour with the story of Jesus' baptism (Matt. 3:17) and transfiguration (Matt. 17:5), Paul with the faith in the Resurrection (Rom. 1:4). From this association some have argued that "Son of God" in the New Testament never referred to the preexistence of Christ. But it is clear in John and in Paul that this implication was not absent, even though it was not as prominent as it became soon thereafter. What made the implication of preexistence more prominent in later Christian use of the term "Son of God" was the clarif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where "Son" was the name for the eternal Second Person (Matt. 28:19). As the Gospels show, the application of the name "Son of God" to Jesus was offensive to the Jews, probably because it seemed to smack of gentile polytheism. This also made it all too intelligible to the pagans, as early heresies indicate. Facing both the Jews and the Greeks, the apostolic church confessed that Jesus Christ was "God's only Son": the Son of God, in antithesis to Jewish claims that the eternal could have no sons; the only Son, in antithesis to Greek myths of divine procreation.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 중의 하나이며 [마태의 복음서] 11장 27절의 진술이 그 예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그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몇몇 경우 복음서의 용법이 이스라엘과 참 신자의 특권으로서 신의 아들됨의 의미를 반영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복음 전도자들은 이 명칭으로 어떤 특별한 영예를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예를 예수의 세례 이야기(마태 3 : 17) 및 변형(마태 17 : 5)과 연결시켰으며, 바울은 부활 믿음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서]의 '하느님의 아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선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후기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에 선재의 의미를 가미하게 된 것은 삼위일체 교리였는데, 여기서 '아들'은 영원한 2번째 위격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마태 28 : 19). 복음서들이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적이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다신교의 시도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 맞서 사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신앙고백했다. '하느님의 아들'은 영원자는 아들을 가질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관념과 정반대되는 것이며, '독생자'는 신의 출산에 대한 그리스 신화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The Lord.

As passages like Rom. 1:4, show, the phrase "Jesus Christ our Lord" was one of the ways the apostolic church expressed its understanding of what he had been and done. Luke even put the title into the mouth of the Christmas angel (Luke 2:11). From the way the name "Lord" (Kyrios) was employed during the 1st century it is possible to see several implications in the Christian use of it for Christ. The Christians meant that there were not many divine and lordly beings in the universe, but only one Kyrios (I Cor. 8:5-6). They meant that the Roman Caesar was not the lord of all, as he was styled by his worshippers, but that only Christ was Lord (Rev. 17:14). And they meant that Yahweh, the covenant God of the Old Testament, whose name they pronounced as "Lord," had come in Jesus Christ to establish the new covenant (see Rom. 10:12-13). Like "Son of God," therefore, the name Kyrios was directed against both parts of the audience to which the primitive church addressed its proclamation. At times it stood particularly for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as in Acts 2:36; but in passages that echoed the Old Testament it was sometimes the preexistence that was being primarily emphasized (Matt. 22:44). Gradually "our Lord," like "Christ," became a common way of speaking about Jesus Christ, even when the speaker did not intend to stress his lordship over the world.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4절에서 처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표현은 사도교회가 예수는 어떤 분이었으며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누가는 그 칭호를 크리스마스 천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다(누가 2 : 11). '주'(키리오스)라는 칭호가 1세기 동안 사용된 방식으로부터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사용했던 그 칭호의 몇 가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우주에 많은 신적인 그리고 주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주(Ⅰ 고린 8 : 5~6)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유형화되었듯이 모든 사람의 주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라는 것(묵시 17 : 14)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불렀던 [구약성서]의 계약의 하느님, 야훼가 새 계약을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로마 10 : 1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과 같이 키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가 대항했던 2가지 부류의 청중들에게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때로 이 명칭은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와 같이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나타냈으나, [구약성서]를 반영하는 문장들에서 때때로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은 선재였다(마태 22 : 44). 점차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주'라는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INCARNATION AND HUMILIATION

성육신과 겸허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Earlier forms of the creed seem to have read: "Born of the Holy Spirit and of the Virgin Mary." The primary affirmation of this article is that the Son of God, the Word, had become man or, as John's Gospel put it, "flesh" (John 1:14). Preexistence and Incarnation presuppose each other in the Christian view of Jesus Christ. Hence the New Testament assumed his preexistence when it talked about his becoming man; and when it spoke of him as preexistent, it was ascribing this preexistence to him whom it was describing in the flesh. It may be that the reference in the creed to the Virgin Mary was intended to stress primarily her function as the guarantee of Christ's true humanity, but the creed also intended to teach the supernatural origin of that humanity. Although it is true that neither Paul nor John makes reference to it, the teaching about the virginal conception of Jesus, apparently based upon Isa. 7:14, was sufficiently widespread in the 1st century to warrant inclusion in both Matthew and Luke, as well as in creeds that date back to the 1st century. As it stands, the creedal statement is a paraphrase of Luke 1:35. In the New Testament the Holy Spirit was also involved in the baptism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이 신조의 더 이른 형태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라고 읽혀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혹은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듯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요한 1 : 14). 선재와 성육신은 서로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그가 인간이 되심을 말할 때 그의 선재를 전제하며 그를 선재하는 자로 말할 때에는 육신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보증하는 그녀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신조는 또한 인성의 초자연적 기원을 의도했다. 바울과 요한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사야] 7장 14절에 근거한 예수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가르침은 1세기에는 널리 퍼져 있어서 [마태의 복음서]·[누가의 복음서]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 신조는 [누가의 복음서] 1장 35절의 의역이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예수의 세례 및 부활과도 관련되었다.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To a reader of the Gospels, the most striking feature of the creed is probably its omission of that which occupied a major part of the Gospels, the story of Jesus' life and teachings. In this respect there is a direct parallel between the creed and the Epistles of the New Testament, especially those of Paul. Judging by the amount of space they devoted to the Passion story, even the writers of the Gospels were apparently more interested in these few days of Jesus' life than they were in anything else he had said or done. The reason for this was the faith underlying both the New Testament and the creed, that the events of Jesus' Passion, death, and Resurrection were the events by which God had accomplished the salvation of human beings. The Gospels found their climax in those events, and the other material in them led up to those events. The Epistles applied those events to concrete situations in the early church. From the way Paul could speak of the Cross (Phil. 2:6-11) and of "the night when he [Jesus] was betrayed" (I Cor. 11:23), it seems that before our Gospels came into existence the church commemorated the happenings associated with what came to be called Holy Week. Some of the earliest Christian art was a portrayal of these happenings, another indication of their importance in the cultic and devotional life of early Christianity. How did the Cross effect the salvation of human beings? The answers of the New Testament and the early church to this question involved a variety of metaphors: Christ offered himself as a sacrifice to God; his life was a ransom for many; his death made mankind alive; his suffering was an example to people when they must suffer; he was the Second Adam, creating a new humanity; his death shows people how much God loves them; and others. Every major atonement theory of Christian theological history discussed below was anticipated by one or another of these metaphors. The New Testament employed them all to symbolize something that could be described only symbolically, that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counting their trespasses against them" (II Cor. 5:19). (see also Index: Crucifixion, religious art)   이 신조의 특징은 복음서의 중요한 부분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이야기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조와 [신약성서]의 편지들, 특히 바울의 편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유사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 수난 이야기에 할애되었다는 사실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조차 그가 말하고 행한 다른 어떤 것들보다 며칠간의 예수의 삶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의 원인은 [신약성서]와 신조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인데, 그것은 곧 예수의 수난·죽음·부활 사건이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신앙이다. 복음서에서 이 사건들은 절정을 이룬다. 편지들은 그 사건들을 초기 교회의 구체적 상황들에 적용시켰다. 바울이 십자가(필립 2 : 6~11)와 '그(예수)가 배반당하신 밤'(Ⅰ 고린 11 : 23)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서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불려온 것과 이와 연관된 사건들을 교회가 기념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일부는 이러한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또다른 일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헌신적인 삶에서 수난사건의 중요성을 암시했다. 십자가는 어떻게 인류의 구원에 영향을 끼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의 대답은 다양한 은유들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드렸고, 그의 생명은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양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인류를 살렸다. 그의 고난은 사람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을 위한 모범이었으며, 그는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제2의 아담이었다. 그의 죽음은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은유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사의 주요한 대속(代贖) 이론을 예시한다. [신약성서]는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Ⅱ 고린 5 : 19)라는 내용을 상징하기 위해 이 은유들을 사용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며

This phrase was probably the last to be added to the creed. Its principal source in the New Testament was the description in I Pet. 3:18-20 of Christ's preaching to the spirits in prison. Originally the descent into hell may have been identified with the death of Christ, when he entered the abode of the dead in the underworld. But in the time before it entered the creed, the descent was frequently taken to mean that Christ had gone to rescue the souls of the Old Testament faithful from the underworld, from what western Catholic theology eventually called the limbo patrum. Among some of the Church Fathers the descent into hell had come to mean Christ's declaration of his triumph over the powers of hell. Despite its subsequent growth in importance, however, the doctrine of the descent into hell apparently did not form an integral part of the apostolic preaching about Christ. (see also Index: limbus patrum)   이 구절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신조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었다. [신약성서] 안에서 이 신조의 근거는 갇혀 있는 영들에게 그리스도가 설교했다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3장 18~20절의 내용이다. 본래 지옥으로 내려감은 아마 그리스도의 죽음, 즉 그가 지하의 죽은자의 거처에 들어갔을 때와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조에 들어오기 이전에, 하강은 서방 가톨릭 신학에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연옥(limbo patrum)으로 불리는 지하세계로부터 [구약성서]의 신실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몇몇 교부들은 지옥으로 내려감을 지옥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요성이 계속 증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내려감의 교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설교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되지는 못했다.

 

GLORIFICATION

영화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The writers of the New Testament nowhere made the Resurrection of Christ a matter for argument, but everywhere asserted it and assumed it. With it began that state in the history of Jesus Christ that was still continuing, his elevation to glory. They used it as a basis for three kinds of affirmations. The Resurrection of Christ was the way God bore witness to his son, "designated Son of God in power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Rom. 1:4); this theme was prominent also in the Book of Acts. The Resurrection was also the basis for the Christian hope of life after death (I Thess. 4:14), and without it that hope was said to be baseless (I Cor. 15:12-20). The Resurrection of Christ was also the ground for admonitions to manifest a "newness of life" (Rom. 6:4) and to "seek the things that are above" (Col. 3:1). The writers of the New Testament themselves expressed no doubt that the Resurrection had really happened. But Paul's discussion in I Cor. 15 shows that among those who heard the Christian message there was such doubt, as well as efforts to rationalize the Resurrection. The differences among the Gospels, and between the Gospels and Paul, suggest that from the outset a variety of traditions existed regarding the details of the Resurrection. But such differences only serve to emphasize how universal the faith in the Resurrection was amid this variety of traditions.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할 내용으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단언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부활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를 말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3종류의 확증을 위한 근거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로마 1 : 4)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방식이었다. 부활은 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소망의 근거였다(Ⅰ 데살 4 : 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생명"(로마 6 : 4)을 나타내며, "천상의 것들을 추구"(골로 3 : 1)하라는 훈계의 근거였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의심 없이 표현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에 나오는 바울의 논쟁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부활을 합리화하려는 노력들뿐만 아니라 의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과 복음서와 바울 편지 간의 차이점들은 부활의 내용에 대해 다양한 전승이 시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들은 다양한 전승들 속에서 얼마나 부활 신앙이 보편적이었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As indicated earlier, the narrative of the Ascension is peculiar to Luke-Acts, but other parts of the New Testament may refer to it. Eph. 4:8-10 may be such a reference, but many interpreters hold that for Paul Resurrection was identical with Ascension. That, they maintain, is why he could speak of the appearance of the risen Christ to him in continuity with the appearances to others (I Cor. 15:5-8) despite the fact that, in the chronology of the creed, the Ascension intervened between them. Session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was apparently a Christian interpretation of Ps. 110:1. It implied the elevation--or, as the doctrine of preexistence became clearer, the restoration--of Christ to a position of honour with God. Taken together, the Ascension and the session were a way of speaking about the presence of Christ with the Father during the interim between the Resurrection and the Second Advent. From Eph. 4:8-16, it is evident that this way of speaking was by no means inconsistent with another Christian tenet, the belief that Christ was still present in and with his church. It was, in fact, the only way to state that tenet in harmony with the doctrine of the Resurrection.   승천 이야기는 특별히 [누가의 복음서]·[사도행전]에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승천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8~10절이 그 예이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는 바울이 부활을 승천과 동일시했다고 주장한다. 성부의 우편 착석은 분명히 [시편] 110편 1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해석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위치로 그리스도가 고양(또는 선재교리에 대한 확증)된 것을 의미한다. 승천과 착석은 부활과 재림의 중간 시기 동안 성부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현존방식이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8~16절에 의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또다른 그리스도 교리, 즉 그리스도가 아직도 그의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와 함께 현존하고 있다는 믿음과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사실 이것은 승천 교리를 부활 교리와 조화시켜 말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The creed concludes its Christological section with the doctrine of the Second Advent: the First Advent was a coming into the flesh, the Second Advent a coming in glory. Much controversy among modern scholars has been occasioned by the role of this doctrine in the early church. Those who maintain that Jesus erroneously expected the early end of the world have often interpreted Paul as the first of those who began the adjustment to a delay in the end, with John's Gospel as a more advanced stage of that adjustment. Those who hold that the imminence of the end was a continuing aspect of human history as Jesus saw it also maintain that this phrase of the creed was a statement of that imminence, without any timetable necessarily implied. From the New Testament it seems that both the hope of the Second Coming and a faith in the continuing presence of Christ belonged to the outlook of the apostolic church, and that seems to be what the creed meant. The phrase "the quick and the dead" is a summary of passages like I Cor. 15:51-52 and I Thess. 4:15-17.   사도신경은 재림교리로서 그리스도론 부분을 결론짓는다. 초림은 육체로 온 것이고, 재림은 영광 가운데 오는 것이다. 기존 교회에서 이 교리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 많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예수가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잘못 기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종말을 세상 끝날로 지연·조정하려고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으며, [요한의 복음서] 는 더 진보된 단계로 본다. 예수가 보았듯이 종말의 임박성이 인간 역사의 지속적인 국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그 임박성의 진술이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재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지속적 현존에 대한 믿음은 사도교회의 전망에 속했고, 이것이 사도신경이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51~52절과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15~17절의 요약이다.

In order to complete the confession of the creed regarding the glorification of Christ, the Nicene Creed added the phrase: "Of His kingdom there shall be no end." This was a declaration that Christ's return as judge would usher in the full exercise of his reign over the world. Such was the expectation of the apostolic church, based upon what it knew and believed about Jesus Christ.

 

그리스도의 영화에 대한 신앙고백을 완성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는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다.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에 대한 그의 완전한 통치의 실현이라는 선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았고 믿었던 것에 기초한 사도교회의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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