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소리가 여름을 달구었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을 재촉하는 느낌이다. 어린 시절엔 매미의 소리는 아름다운 노래로만 들렸다.

흐르는 냇물소리도 자연의 장단으로만 들려 흥얼거렸는데 요즘엔 매미의 소리가 매미의 울음으로 들린다. 무슨 연유일까? 코로나로 인한 울적함 때문일까?

매미의 소리는 숫놈이 짝을 청하는 유혹의 멜로디가 맞는가? 아니면 불러도 짝이 오지 않기에 비명의 울음소리 인가가?

생물학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가를 구별하기보다 그 소리는 여전한데 듣는 내가 좀 변했다는 진실이 깨달아진다. 어렸을 때의 순수함이 사라져버리고 세상에 찌들어버린 것 같다.

세상의 잡음에 귀를 빼앗겨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져 버렸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사라져버린 안타까움을 깨닫게 한다.

이런 기도를 진솔함으로 드린다. 하나님! 진정 영혼을 깨우시고 신령한 것에 민감하게 하셔서 매미의 찬양을 찬양으로 듣게 하옵소서!

우주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연주와 합창을 듣을 수 있는 신령한 영성을 주옵소서!

말씀에 깨어 하나님의 섭리가 보여지고 세미한 주의 음성을 듣게 하옵시며 주님의 재림의 징조를 보게 하소서! 코로나로 허물어진 믿음과 삶에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성전에서 영과 진리로 살아있는 예배가 불타오르게 하시고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임하여 죄와 허물을 태워 거룩을 회복케 하옵소서!

코로나로 흉년이 든 생업 위에 단비로 풍작을 거두게 하소서! 코로나로 쌓아 올린 불신의 벽이 무너지고 이웃과 손을 잡고 해외선교도 가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옵소서!

 

코로나로 피폐해진 우리의 심령과 삶 속에 진정 예수가 있는가? 그는 당신에게 누구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 믿는 실제를 보여주고 있는가?

예수가 없는 교회생활, 예수를 잘 모르는 신앙생활, 예수와 무관한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는가?

진정 예수를 모르거나 외면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 진리가 없고 소망도 없는 자로 진정한 생명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말씀하신다. 예수가 없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받아야 한다! 최고로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늘과 땅 그리고 공기를 비롯하여 만물을 창조하여 인류에게 주셨고 나아가 자신을 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주신다!

사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을 받는다는 것은 역설이며 불가능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피 흘려 우리를 거룩하게 씻으셔서 구원으로 자신을 담게 하셨다.

이것이 최고의 사랑이시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요1:14)이 예수 그리스도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다”(골1:15)라고 성경은 밝힌다.

그리하여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를 바로 알고 힘써 알자! 그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느8:10).

 

성경에서 말하는 형상(eikon)이란? 정교한 조각이나 초상화처럼 완벽한 묘사, 정밀한 복사, 정확한 복사를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의 지혜와 능력이 곧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그리하여 죽은 자를 살리시고, 나면서부터 못 보고, 못 걷는 자들을 치유하시며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주셔서 자유를 주시는 구원의 주로 우리에게 오셨다.

태양과 빛이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과 하나님도 분리되지 않으며 둘 중 어느 한 분만 존재한 적도 없으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을 것”(요14:9)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고 밝히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마치시고 고향인 나사렛을 찾으셨다(막6:1).

구약의 나오미처럼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이유는 대개 타향에서 서러움과 실패로 인한 상한 마음을 고향의 품에 안겨보고자 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향을 품는 가슴을 보게 하신다. 고향에 기대고 안겨보려는 마음이 아니라 고향을 품고 구원시켜야 한다는 하나님 사랑의 간절함으로 고향인 나사렛에 내려오신 것이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다. 그때 고향 사람들이 듣고 다 놀라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기적과 권능이 어찌됨이냐”(막6:2)며 놀랐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듣고 보는 엄청난 실제요, 놀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누구에게 배우고, 누구에게 얻어서 그런 지혜와 능력을 소유했는가 생각하며 놀랐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 지혜와 능력 그리고 권세 그 자체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 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영접해야만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연구하고 깨닫는 영역이 아니라 믿으면 알아지고 소유하게 되는 신령한 비밀이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할렐루야!

 

안식일에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능력을 본 자들은 어떻게 예수님께 반응했나?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배척한지라”(막6:3)

고향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offense)했다. 첫째, 그들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그들이 회당에 모인 것은 훌륭한 설교와 성경 강해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선 자는 한 젊은 목수이었다. 목수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겠어? 그들은 귀를 막아버렸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을 주시려 하는 엄청난 만남 앞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닫혀버리는 비극을 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택하여 정성을 다해 신앙훈련을 시켰으나 가롯 유다에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그의 부정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어떤 여자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왜 예수는 이런 낭비를 말리지 않는가”라며 그를 비평한다.

“왜 예수는 대중의 인기를 활용하여 영광의 보좌를 구축하지 않고 죽으려 하는가”며 유다는 불만을 품는다(요12:4) 그는 자신의 이해타산으로 예수님을 관찰하기에 매사가 부정적으로만 보였다.

죄 많은 여인이 옥합을 깨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새 생명의 탄생과 감사의 진실을 유다는 못 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넘어에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 있고, 그가 받는 수모와 수난 속에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약동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면은 못 보며 부정만 보고 있었다.

 

둘째, 나사렛 사람들은 독단과 교만으로 예수님의 설교를 외면해버렸다. 우리는 너를 잘 안다. 그러니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

“저 사람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아닌가! 그의 남동생들인 야고보와 요셉, 유다와 시몬이 우리 동네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이 이 마을에서 코 흘리며 자란 것까지 우리가 다 아는데 무엇을 더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의 설교라 할지라도 교만과

다 안다는 철의 장막은 뚫고 들어갈 수 없었던 차단의 벽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자기가 체포될 것과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그 일은 선생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있게 말하며 다 아는 것처럼 항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이 물러가라”(막8:33)고 호령하셨다. 베드로처럼 야고보와 요한과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영광을 누린다는 자기중심적인 원리를 따라 예수님을 이해하는 독단과 교만은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꺼꾸로 알고 있는 것이기에 사탄이 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을 우리는 “아멘”(고후1:20)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지혜와 능력을 축복으로 받아야 한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설교가 능력과 축복으로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하고 무효화가 되어버렸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6:6)고 기록하고 있다.

진정 꼭 믿을 사람들 같은데 뜻밖에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생활이 습관화되고 형식화되어버린 민낮을 들어낸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눅4:24)고 한탄하셨다. 고향 사람이란 너무나 가깝고 친근한 사람을 말한다.

신앙생활 즉 찬송이나 성경이나 예배나 기도나 말에 있어서도 은혜니 감사니 사랑이니 헌신이니 하는 기독교 용어가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화가 되고 만성이 되어 형식화에 빠져버린 모습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말라버린 자들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곱씹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치료받고 구원받아 축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한다.

그러나 벳세다 사람들은 전혀 그의 능력과 권세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지 못하고 배척해버렸다.

왜?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야고보의 형제로만 알고 그 이상은 전혀 마음을 열지 않고 닫아버린 독단과 교만이었다. 나아가 다 안다는 형식과 습관에 갇혀버린 어리석음이었다.

이는 예수를 세상과 인간의 기준을 삼아 해석하는 사상으로 세상의 가치관이요, 마귀의 유혹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아들, 목수, 벳세다의 촌사람이라고 천시하는 것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작전과 전술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인간과 모든 만물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이름으로 보증을 받는 자가 진정 복되고 능력 있는 자다.

서울대 출신의 목사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주의 종이어야 하고, 부자와 세리장인 삭개오보다 주님을 영접하여 변화를 받은 삭개오라 하며,

돈과 권세 있는 장로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는 비결이다.

나아가 내가 일하여 번 돈보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이라는 그의 은혜와 가치를 앞세우며 살아가는 자가 큰 역사를 이룰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와 능력보다 백배로 사용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라고 축복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복이 있는 자요, 네 이름을 베드로라 할 것이라며 이름과 운명을 바꾸어주시고 네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엄청난 축복과 비전을 주셨다. 예수!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이름이요,

예수! 그 이름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신을 받는 축복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요, 하나님의 비밀임을 기억하자!

예수님께서 진실을 말씀하시고 능력을 보여주며 죽음으로 증거하시는데 믿지 않음을 통탄해 하시며 심히 이상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진실을 배척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너무 늙었고 아내인 사라의 경수도 끊어졌으나 하나님께서 네게 아들을 줄 것이며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창대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롭다하심을 얻었고(창15:6)

이삭을 낳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얻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장로들을 청하여 예수님께 아뢰어 구해주실 것을 간청했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 고쳐주려했을 때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7:6).

“말씀만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7)라며 최고의 권세 곧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인 예수님의 명령만을 간구했다.

예수님은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다(7:9)며 칭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셨다. 주를 믿는 믿음의 역사를 이루며 살자!

오늘도 영광교회인 목사의 설교보다 주의 종인 목사의 설교라는 믿음으로 듣고 지혜와 능력을 받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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